참선요지 서문
선(禪)은 가장 궁극적인 일이며, 모든 부처님의 정법안장이다. 이 일은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마음 갈 길이 소멸해 버린 자리이며, 생각으로는 미칠 바가 아니다.
달마 스님이 서쪽에서 오셔서 '문자를 세우지 않고 곧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켜[不立文字 直指人心], 성품을 보아 부처를 이루게 한다' 하였으니, 만약 어떤 사람이 바로 그 자리에서 알아 버리면 곧 부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 될 것이다. 앞으로는 다만 인연을 따르면서 과거의 업을 녹이고, 다시 새로운 재앙을 짓지 말라. 타고난 본래면목이 털끝만큼도 모자람이 없다. 자신의 옷 속의 구슬을 어찌 잃어버린 적이 있겠는가. 원래 찾을 것이 없다.
송대에 와서 사람들의 근기가 점점 하열해지자 조사 스님들이 그 증세에 맞는 약을 베풀게 되어 화두를 참구하는 법문을 열게 되었지만, 실은 화두도 망상의 하나일 뿐이다. 이것은 독(毒)으로써 독을 공격하는 것이니, 자기가 참구하는 화두로써 잡념을 대적하여 꾸준히 밀고 나가면 점점 주체와 객체가 함께 없어지고, 나타나는 업과 흐르는 식은 끊어지며, 헛된 마음이 다 소멸되는 때에 도달하여, 어떤 경계나 인연을 만나게 되면, 무엇에 딱 부딪치듯, 열쇠가 자물쇠에 꼭 들어맞듯, 홀연히 허공이 부서지고 대지가 가라앉으면서 자기의 본래 성품을 볼 것이다. 이렇게 되면 큰 일을 해 마친 것인데, 어느 시대나 이런 인물이 나오지 않는 때는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성취하는 사람이 적어서 멀리 당대의 왕성함에 미치지 못하니 무슨 까닭인가. 사람이 옛 사람들에 미치지 못하고, 법(法, 깨달음)이 종취(宗趣, 선종의 궁극적 이치)를 깊이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왕년에 나의 스승이신 허운 스님께서 운문산을 이끄실 때, 당시의 (수행자들의 이러한) 병을 구하기 위해, 남의 욕먹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참선의 요지를 염출(拈出, 집어냄)하여 선후를 제시한 것이 상당히 많은데, 이미 스님의 어록에 실려 있다. 이것을 읽어 본 사람은 자기가 나아갈 길을 분명히 알 것이다.
스님께서는 특별히 화두와 화미를 분별하여 말씀하시기를, "말[話]은 마음에서 일어나므로 마음이 말의 머리[頭]이다" 하셨다. 또, "이른바 화두란 곧 한 생각 일어나기 이전[一念未生之際]이며, 한 생각이 일어났다 하면 이미 화미를 이룬다" 하셨다. 또 말씀하시기를, "죽도록 문 두드리개만 꼭 쥐고, '염불하는 자는 누군가'를 계속 염(念)할 뿐이니 이것은 염화두를 이룰 뿐이다. 이렇게 하면 의정이 일어나 깨달음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화미에서 마음을 쓰는 것이어서 곧 생멸법이며, 결국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경지에는 이르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하셨다. 무릇 이것은 예전 사람들이 말하지 못한 귀중한 말씀이다. 이 외에도 네 가지 경계의 병과 그 병을 대치하는 약을 가르치셨으니, 이 역시 노파심의 간절함이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
홍콩의 불경유통처(佛經流痛處) 임협암 거사가 이 법문을 읽고 난 뒤에 더욱 이 구절을 좋아했다. 그리하여 이것을 단행본 소책자로 만들어 널리 중생을 건지고자 하니, 참으로 좋은 일이다. 임선생은 법을 가려내는 안목의 밝기가 마치 검은 용의 턱 안에서 구슬을 찾아내는 것과 같다.
옛 성현 구여직은 "만물 중에 사람으로 태어나고, 사람 가운데 남자가 되고, 남자로서 책을 읽고, 책 중에서도 불경[竺墳]을 읽을 줄 알고, 불경 중에도 선종을 알았으니, 이것은 마치 젖을 구해 먹는 데 설산에 사는 소의 우유를 얻고, 그 우유에서 다시 타락을, 타락에서 소(曧)를, 소에서 다시 제호를 얻은 것과 같다"고 했다.
아아, 사람 몸 얻기 어렵고, 불법을 듣기도 어려우며, 중국에 태어나기도 어렵고, 선지식을 만나기도 어렵다. 우리는 다행히도 스님께서 세상에 출현하신 것을 만나서 네 가지 어려움을 다 극복했으며, 임선생 등 여러 사람은 법을 듣고 믿어 대중에 공양하게 되었다. 경전에 이르기를 '여러 가지 공양 중에 법공양이 최상이라' 했으니, 이러한 공덕이 산수비유로 어찌 미칠 수 있으리오.
가까운 분이 편지를 보내어 나에게 서문을 부탁하니, 수천 리 밖에서 소리와 기운이 서로 응한 것이다. 이는 5백 생전의 인연의 결과라, 나의 모자람에도 사양도 아니하고 억지로 비단 위에 꽃을 더했으니, 여러 사람의 뜻에 따르느라 결국 부처님의 머리 위에 똥을 바른 셈이다.
불기 2,500년(1956년) 초여름
말레이시아 불학사 도사실
석융희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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